아시아·태평양 경제협력체(APEC) 정상회의 전 타결을 목표로 한국과 미국이 막판 관세 협상에 돌입했다. 김용범 대통령실 정책실장과 김정관 산업통상부 장관이 16일 함께 미국으로 출국해 추가 협상을 진행한다. 스콧 베센트 미국 재무장관은 15일(현지시간) 한국과의 무역 협상이 마무리 단계라고 밝혔다. 양국의 무역 합의가 임박했다는 관측이 나온다.
15일 통상당국에 따르면 최근 미국 측이 한국에 협상 수정안을 제시해, 이에 대한 후속 협의가 이뤄지고 있다. 이와 관련해 베센트 장관은 이날 CNBC와의 대담에서 현재 어떤 무역 협상에 가장 집중하고 있냐는 질문에 “내 생각에 우리는 한국과 마무리하려는 참이다(we are about to finish up with Korea)”라고 답했다. 그는 한국의 대미 투자를 두고 이견이 있지 않냐는 질문에는 “악마는 디테일에 있지만 우리는 디테일을 해결하고 있다(ironing out the details)”고 말했다. 그는 또 한·미 양국 관계자들이 이번 주 워싱턴에서 열리는 국제통화기금(IMF)과 세계은행 연차총회 중 별도 회동을 가질 것이라고도 설명했다.
김 실장과 김 장관은 한·미 관세 협상 후속 논의를 위해 워싱턴DC로 이동해 하워드 러트닉 미국 상무장관을 만날 예정이다. 여한구 산업부 통상교섭본부장은 전날 선발대로 출국해 협상을 준비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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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용범 “미국, 상당히 의미있는 대안 제시”
구윤철 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도 15∼16일(현지시간) 워싱턴DC에서 열리는 ‘주요 20개국(G20) 재무장관·중앙은행총재 회의’ 등 참석을 계기로 베센트 재무장관과 만나 관세 문제를 논의할 계획이다.
최근 2주 사이 미국이 한국 측 수정 대안에 ‘의미 있는’ 반응을 보였고, 새 제안을 한국에 전달하면서 협상 기류가 달라졌다. 김용범 실장은 이날 삼프로TV와의 인터뷰에서 “미국 쪽에서 한참 동안 말이 없었는데, 이번에 김정관 장관이 갔을 때 미국 쪽에서 의미 있는 코멘트를 했고 상당히 의미 있는 대안을 제시했다”고 설명했다. 앞서 김 장관은 추석 연휴 중이던 지난 4일 ‘카운터파트’인 러트닉 장관과 만나 협상을 진행했다.
그는 “데드라인이 따로 있는 것은 아니지만, (한·미) 두 정상이 만나는 계기가 그렇게 자주 오는 것도 아니기 때문에 아시아·태평양 경제협력체(APEC) 정상회의가 실질적으로 큰 목표”라고 말했다. 한·미 간 관세 협상이 조만간 마무리될 수 있다는 낙관론을 펼친 것이다.
한·미 양국은 그간 최대 쟁점이었던 3500억 달러(약 498조원) 규모의 대미 투자 패키지에 대해 막판 접점을 모색할 예정이다. 미국 정부는 일본처럼 3500억 달러를 대부분 현금으로 제공하는 ‘백지수표’ 방식을 원하고 있다. 반면에 한국 정부는 외환시장 안정성과 재정 부담을 고려해 직접 지분 투자는 최소화하고 보증과 대출 중심으로 투자 구조를 짜야 한다는 입장이다. 또한 미국이 지분 투자 규모 확대를 요구한다면 ‘안전판’ 성격의 무제한 통화스와프(양국 통화 맞교환 협약)가 필요하다는 전제도 달았다.
김 실장은 “미국이 한국이 말하는 상황을 이해하며, 나름대로 대안을 내놓은 것이라 의미 있는 진전이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다만 미국이 제시한 수정안의 구체적인 내용은 공개되지 않았다. 결국 미국이 한국의 요구를 얼마나 반영했는지가 이번 협상의 분수령이다. 김 실장은 “3500억 달러를 일시에 낼 수는 없으며, 미국 제조업 부흥에 실질적 기여가 가능한 사업이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한 외교 소식통은 “정책실장까지 투입된 것은 정상 간 회담 전 협상 틀을 안정화하겠다는 뜻”이라며 “이번 방미에서 합의의 골격을 마련하고, 세부 문구 조정 등은 이후로 넘길 가능성이 크다”고 전했다.
미·중 갈등이 고조된 상황이 한·미 협상 타결 가능성을 높였다는 분석이 나온다. 베센트 장관은 “미국의 주식시장이 하락한다 해도 중국과의 무역 협상 입장을 바꾸지는 않을 것”이라고 했다. 장상식 한국무역협회 국제무역통상연구원장은 “미·중 갈등이 격화되면서 미국 입장에서는 한국과의 협상을 조기에 타결할 필요성이 커졌다”며 “한국과의 공급망 협력을 강화하는 방향으로 협상 속도를 높일 가능성이 있다”고 짚었다. 이재민 서울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도 “미국이 3500억 달러 현금 투자가 물리적으로 불가능하다는 점을 인식한 듯 보이며, 보다 현실적인 수정안을 제시했을 가능성이 있다”며 “3~4개월째 이어진 협상 장기화로 양측 모두 피로감이 누적되면서 오히려 타협 의지가 커진 측면도 있다. 9월보다 10월이 협상 여건은 더 나아졌다”고 평가했다.